1. 가장 길었던 하루
1944년 6월 6일은 2차 세계대전의 역사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로 불린다. 그날 새벽, 영국 해협을 건너 노르망디 해변으로 향한 15만 6천 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날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 중 4천 명 이상이 그날을 살아서 끝내지 못했다. 오늘은 그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그날의 결정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본다.

2. 오버로드 작전 — 2년의 준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공식 명칭은 오버로드 작전이었다. 준비에만 2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상륙 예정 지점을 노르망디가 아닌 파드칼레로 오인하도록 하는 포티튜드 작전을 병행했다. 허구의 부대 FUSAG에 실존 장성 조지 패튼을 배치해 독일군의 스파이에게 노출시켰고, 가짜 탱크와 항공기, 허위 무선 통신으로 독일 정보부를 속였다. 이 기만 작전은 극도로 성공적이었다.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도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일부는 진짜 상륙이 파드칼레에서 올 것이라는 믿음을 한동안 버리지 못했다.

3. 아이젠하워의 결정 — 단 하나의 단어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D-Day의 날짜 결정은 극심한 압박이었다. 상륙작전은 달빛, 조수, 새벽 시간대의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했고, 그런 날짜는 매달 며칠에 불과했다. 6월에는 5일, 6일, 7일이 그 조건을 충족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6월 4일 악천후 예보로 5일 상륙은 취소되었다. 6월 6일에도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기상예보팀이 일시적인 기상 완화를 예측했다. 아이젠하워는 6월 5일 새벽 4시 15분,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간단히 말했다. 가자. 만약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아이젠하워는 이미 실패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성명서를 준비해 두었다. 그 성명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약 이 작전에서 비난을 받을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 혼자다.

4. 새벽 3시 — 공수부대의 강하
6월 5일 밤에서 6일 새벽에 걸쳐, 미국 제82공수사단과 제101공수사단, 그리고 영국 제6공수사단이 노르망디 내륙으로 강하를 시작했다. 이들의 임무는 독일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해변 측면의 교량과 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짙은 구름과 독일군 대공포화로 인해 낙하 지점이 광범위하게 분산되었다. 많은 병사들이 목표 지점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착지했고 일부는 호수와 늪지에 빠졌다. 제101사단의 경우 목표 지점에 집결한 병력이 초기에는 전체의 15%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광범위한 분산이 독일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효과를 낳았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실제 전력을 파악하지 못한 채 여러 방향에서 공격받는다고 생각했다.

5. 오마하 해변 — 지옥의 아침
6월 6일 오전 6시 30분,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의 5개 해변에서 동시에 상륙을 시작했다. 서쪽부터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해변이었다. 미군이 담당한 오마하 해변은 그날 가장 처절한 전장이 되었다. 오마하 해변은 30미터 이상의 절벽이 해안을 내려다보는 지형이었고, 독일군 방어 진지가 이상적인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다. 첫 상륙 파도에서 많은 수륙양용 전차들이 거친 파도에 침몰했다. 상륙정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병사들은 집중 사격을 받았다. 첫 몇 시간 동안 오마하 해변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병사들이 절벽 쪽 경사면의 지뢰밭을 뚫고 진격하기 시작했고, 차츰 독일군의 방어선에 균열이 생겼다. 오마하에서만 연합군 사상자는 2천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6. 롬멜의 부재와 독일의 대응 지연
D-Day가 완전한 기습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독일군도 상륙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언제, 어디서 올지를 몰랐다. 그날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서부 방어의 핵심 인물인 에르빈 롬멜 원수는 본국에 있었다. 그는 6월 6일이 아내 루시아의 생일이었고 며칠간 집에 머물다가 히틀러를 만나 증원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상륙 소식을 접한 롬멜은 서둘러 복귀했지만 이미 중요한 초기 대응 시간을 놓친 뒤였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독일 기갑 예비대였다. 기갑 부대의 이동 명령은 히틀러만이 내릴 수 있었는데, 히틀러는 그날 아침 늦게까지 수면 중이었고 참모들은 그를 깨우기를 망설였다. 기갑 부대가 노르망디로의 이동 명령을 받은 것은 오후 4시가 되어서였다.

7. 저녁까지 — 교두보 확보
6월 6일 저녁까지 연합군은 5개 해변 모두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5개 해변이 완전히 연결된 것은 이틀 뒤인 6월 8일이었다. 그날 하루 연합군의 전체 사상자는 전사, 부상, 실종, 포로를 합해 약 1만 명에서 1만 2천 명으로 추산된다. 독일군도 4천 명에서 9천 명의 손실을 입었다. 저녁 무렵 연합군은 해안에서 최대 10킬로미터 내륙까지 진격한 지점들을 포함해 약 80킬로미터 해안선을 따라 거점을 확보했다.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오버로드 작전의 첫날은 목표를 달성했다.

8. D-Day가 바꾼 전쟁의 흐름
노르망디 상륙은 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후 약 2개월에 걸친 노르망디 전투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했다. 8월 25일 파리가 해방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을 괴멸시키는 대공세를 동시에 전개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동서 양 방향에서 동시에 밀려들어오는 압박을 받았다. 독일의 패전은 이제 시간의 문제였다. 1945년 3월 연합군이 라인강을 건넜고, 4월 말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했다.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9. 노르망디 군 묘지와 기억
노르망디에는 지금도 수십 개의 군 묘지가 있다. 미국 노르망디 군 묘지에는 9천 388명이 잠들어 있다. 그들 대부분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이들이었다. 독일군 묘지에는 2만 1천 명 이상이 묻혀 있다. 매년 6월 6일 노르망디 해변에서는 기념식이 열리고 각국 정상들이 참석한다. 2024년의 80주년 기념식에는 몇 안 남은 참전 용사들이 휠체어에 앉아 참석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비우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10. D-Day가 던지는 질문
1944년 6월 6일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전쟁이 치르는 처참한 대가를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마하 해변의 모래사장에 쓰러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은 그 대가를 몸으로 치렀다.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유럽이, 오늘의 자유 세계가 서 있다. D-Day는 역사 속의 한 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날이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D-Day의 장면은 무엇인가요? 댓글로 나눠주세요.

10. D-Day가 던지는 질문
1944년 6월 6일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전쟁이 치르는 처참한 대가를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마하 해변의 모래사장에 쓰러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은 그 대가를 몸으로 치렀다.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유럽이, 오늘의 자유 세계가 서 있다. D-Day는 역사 속의 한 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날이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살아남아 70년 이상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참전 용사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남겼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D-Day의 장면은 무엇인가요? 댓글로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