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류가 핵전쟁에 가장 가까웠던 날
냉전 역사상 인류가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날은 1962년 10월 27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날 카리브해 깊은 수심 아래, 소련 해군의 잠수함 B-59 안에서 핵어뢰 발사 명령이 내려졌다. 세 명의 장교 중 두 명이 동의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 거부했고, 그 거부가 세계를 구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실리 아르히포프였다.

2. 쿠바 미사일 위기의 배경
1962년 10월 14일, 미국 U-2 정찰기가 쿠바에서 소련의 탄도미사일 기지 건설 현장을 포착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즉각 위기 대응에 돌입했고,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해상 봉쇄를 공개 선언했다. 소련과 미국 양측은 핵전쟁 준비 태세를 격상했다.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 13일간의 긴장이 시작되었다. 10월 27일은 그 13일 중 단연 가장 위험한 하루였다. 그날 하루에만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 여러 건 동시에 발생했다.

3. B-59 잠수함과 핵어뢰
소련 해군은 쿠바 위기 당시 4척의 폭스트롯급 잠수함을 북대서양과 카리브해로 비밀 파견했다. 그 중 한 척이 B-59였다. 각 잠수함에는 핵어뢰 한 기씩이 탑재되어 있었고, 핵어뢰 발사는 함장, 정치 장교, 부함대장 세 사람의 만장일치 동의를 필요로 했다. B-59의 함장은 발렌틴 사비츠키 중령이었고, 부함대장이자 잠수함 분대 참모장을 겸임하고 있던 사람이 바실리 아르히포프였다. 아르히포프는 1961년 K-19 잠수함 핵사고 당시 침착하게 위기를 관리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4. 수심 아래 72시간 — 극한의 조건
B-59는 미국 해군의 추적을 피해 며칠째 깊은 수심에 잠항 중이었다. 디젤 잠수함인 B-59는 배터리 충전을 위해 주기적으로 부상해야 했지만, 미국 함선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부상이 불가능했다. 함내 온도는 최대 60도에 달했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졌다. 승무원들은 탈진 상태였다. 지상과의 무선 통신이 두절된 탓에 지상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비츠키 함장은 어쩌면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들이 B-59에게 부상하라는 경고로 수중 폭발물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5. 발사 명령과 아르히포프의 거부
수중 폭발이 잇달아 터지자 함내 공황은 극에 달했다. 사비츠키 함장은 이것이 실제 공격이라고 판단했고 핵어뢰 발사 준비를 명령했다. 정치 장교 이반 마슬레니코프도 동의했다. 두 사람의 동의가 확인됐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동의권자, 바실리 아르히포프의 차례였다. 아르히포프는 거부했다. 그는 지상과의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승인받지 않은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비츠키를 설득했다. 길고 격렬한 논쟁 끝에 B-59는 핵어뢰를 발사하지 않고 부상했다. 부상했을 때 미국 함선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6. 같은 날 지상에서 — 10월 27일의 또 다른 위기들
10월 27일은 B-59 만의 위기가 아니었다. 같은 날 오전, 쿠바 상공을 비행하던 미국 U-2 정찰기가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SA-2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조종사 루돌프 앤더슨 소령이 사망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즉각적인 보복 공습을 요청했다. 케네디는 자제했다. 또한 같은 날 오후, 다른 U-2기가 항법 오류로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가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 방공 전투기가 요격을 위해 출격했고, 미국 방공 전투기도 대응 출격했다. 이 사건들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오판이나 사고가 일어났다면 전쟁의 방아쇠가 당겨졌을 수 있었다.

7. 케네디와 흐루쇼프의 비밀 타협
10월 27일 저녁,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이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을 법무부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두 사람의 협상에서 타협안이 도출되었다. 소련이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하면,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공식적으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은 터키에 배치된 핵미사일 주피터도 6개월 이내에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다음 날인 10월 28일 아침, 모스크바 라디오를 통해 흐루쇼프의 쿠바 미사일 철수 발표가 나왔다. 13일간의 위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8. 아르히포프는 누구인가
바실리 아르히포프는 1926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태어나 소련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 군인이었다. 그는 B-59 사건 이전인 1961년에 이미 한 번 핵재앙을 막은 경험이 있었다. K-19 핵잠수함 냉각 시스템 사고 당시 아르히포프는 침착하게 승무원들을 이끌어 상황을 수습했다. B-59 이후 그는 소련 해군에서 계속 승진해 제독으로 은퇴했다. 그의 이야기는 수십 년간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냉전이 끝난 뒤에야 서방에 알려졌고, 2002년 쿠바 미사일 위기 40주년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아르히포프의 선택이 핵전쟁을 막았다고 공식 인정했다. 그는 2001년 타계했다.

9. 왜 핵전쟁은 의도보다 사고로 시작될 수 있나
1962년 10월 27일의 교훈은 핵전쟁이 반드시 최고 지도자들의 의도적 명령으로 시작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B-59의 상황은 통신 두절, 극한의 피로, 공황이 어떻게 핵무기 사용으로 이어질 뻔했는지를 보여준다. 사비츠키 함장은 악인이 아니었다. 그는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판단한 결정을 내리려 했다. 아르히포프가 없었다면 그 판단은 실행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핵전쟁의 가장 큰 위험이다. 이성적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시스템의 실패, 오해, 극한 상황의 압박이 사고적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10. 세계를 구한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바실리 아르히포프의 이름은 케네디나 흐루쇼프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가 토머스 블랜턴이 세계를 구한 남자라고 부른 것은 과장이 아니다.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수천만 명이 즉사했을 것이고, 방사선과 핵겨울의 영향은 전 지구적이었을 것이다. 현재도 세계에는 수천 발의 핵탄두가 배치되어 있다. 1962년의 교훈, 즉 체계적 안전장치와 냉정한 판단의 중요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름 없는 사람의 조용한 결정이 세계를 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0. 세계를 구한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바실리 아르히포프의 이름은 케네디나 흐루쇼프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가 토머스 블랜턴이 세계를 구한 남자라고 부른 것은 과장이 아니다.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수천만 명이 즉사했을 것이고, 방사선과 핵겨울의 영향은 전 지구적이었을 것이다. 아르히포프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재도 세계에는 수천 발의 핵탄두가 배치되어 있다. 1962년의 교훈, 즉 체계적 안전장치와 냉정한 판단의 중요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름 없는 사람의 조용한 결정이 세계를 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르히포프 이야기에 대해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나눠주세요.